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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비에게

봄에 장미 2021. 3. 31. 20:48

나비야. 너의 이름을 써 놓고 한참 동안 생각했어.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다 변명이 될 뿐이겠지만, 적어도 최선을 다해서 변명하고 싶어. 언젠가 너한테 물었잖아. 넌 왜 별칭을 나비라고 했느냐고. 네가 말했지. 나비는 세상 모든 이름 없는 고양이들의 이름이라고. 그냥 길 가는 고양이에게 나비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들이 좋아서 나비라고 했다고. 화를 내면서, 악을 쓰면서 나비야, 나비야, 하진 않잖아, 라고. 그래서 나도 너를 부를 때 나비야, 나비야, 하고 어쩐지 다정하게 불렀던 것 같아. 넌 이름 없는 고양이들에게서 너를 봤을까.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배가 고파서 쓰레기봉투를 뜯는, 이름 없는 고양이라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하기도 하는 그 길가의 애들에게서 너를 봤을까.

*

너희와 있을 때는 나의 좋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나왔어. 그래서 그런 착각도 했어. 나는 나아졌고, 예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너희들에게는 너희가 좋아할 만한 내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어.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식으로 내가 나를 따돌렸던 것 같아. 너희에게 보여 주지 못할 정도로 미워 보이고 창피했던 내 모습을 따돌렸어. 예전부터 그랬었어. 왜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왜 나 스스로가 그렇게도 못나 보였을까. 저리 가. 나는 그 애에게 말했어. 내 눈에도, 남 눈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 왜 너는 죽지도 않아? 사라지지도 않고 그대로 내 안에 남아 있어? 그렇게 거칠게 나를 대하는 게 어른이 되는 것인 줄 알고서. 예전 일들을 잊고, 지워 버리고, 연연하지 않으려 하고, 내 안에 갇힌 그 애가 추워하면 더 외면해서 얼어죽기를 바라고, 배고파하면 그대로 굶어 죽기를 바라면서 겉으로는 평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연기했지. 그게 다 뭐였을까. 그 애는 나였는데. 나비 너는 내가 행복하게 살 거라고 했지.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고. 마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처럼 확신을 담아서 말했지. 그렇게 말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어. 너는 네가 나에게 얼마나 큰 사람이었는지 상상하지 못할 거야. 그 사실이 항상 기쁨이었던 것만은 아니었지만. 너의 말 한마디에 연연하고 마음이 가라앉기도 했으니까.

*

미안해. 창밖으로 해가 뜨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말했어. 정말 미안해. 중력도 마찰력도 없는 조건에서 굴린 구는 영원히 굴러간다. 언젠가 네가 한 말을 난 종종 떠올렸어. 영원히 천천히 굴러가는 공을 생각했어. 그 꾸준함을 상상했어. 이상하게도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 보면 쓸쓸해지더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 모습이 어쩐지 외로워 보여서. 그래도 우린 중력과 마찰력에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구나. 가다가도 멈출 수 있고, 멈췄다가도 다시 갈 수 있는 거지.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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