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본문
싫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같이 연습을 하자고 했다. 싫다고 말해 봐. 은서가 말했다. 나는 은서를 보면서 싫지 않다고 생각했다. 너랑은 연습을 할 수 없겠다고 대답했다. 싫다고 말해 봐. 싫어. 싫다고 말해 봐. 싫은데. 그런 말을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계속 웃었다. 여기에 싫다는 단어를 계속 쓰다 보니까 싫다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단어 같다.
우리에겐 각자의 그늘이 있지. 나는 그 그늘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때로는 그늘이 그 사람을 고유하게 만드는 것도 같다. 어른들은 눈치 못 챘겠지만 나도 종종 그렇다. 욕하고 싶고 울고 싶고 죽고 싶고 내가 너무 초라하고 막막하고 불행한데 이상한 것에 웃음을 멈출 수 없고 아무나 보고 두근거린다. 아니, 아무나는 아니다.
제야는 사람이 저마다 다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사람이 선해지고 나빠지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섭리가 있다면, 삶의 지도가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었다. 다른 길이 있는지, 다른 삶이 가능했던 건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더라도 알고 싶었다. 그럼 조금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력해야 해. 이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노력해야 해.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래야 해.
노력은 힘든 거잖아요. 제야가 중얼거렸다.
마음을 쓰는 거야.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좋은 것을 위해 애를 쓰는 거지.
제야는 일기에 이모의 말을 썼다. 언젠가는 이모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나는 내가 쓸모없는 것 같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나쁜 생각을 끊지 못하고 벌벌 떨고 사람을 경계하고 겉돌면서 점점 더 나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데만 집중하는 것 같아. 쓸모없어야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당연해지니까. 왜냐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니까.
제야는 앞만 보고 걸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근데 그럼 나는 뭐지 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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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객은 어쩔 수 없이 티가 나나 봐. 젊은 여자 혼자 여행 다니는 거냐고 걱정인 듯 참견인 듯 말을 거는 아주머니들을 가는 곳마다 만났어. 여자 혼자면 재워 줄 수 없다던 민박집 주인도 있었어. 여자 혼자라는 사실이 많은 사람을 걱정과 의문에 빠트리나 봐. 처음에는 그런 말이 불편했는데, 거듭되니까 오히려 궁금증이 커지더라. '젊은' '여자' '혼자' 중에 사람들을 가장 세게 건드리는 단어는 뭘까. … 혹시 내가 '젊은 여자 혼자' 여서 그런가, 생각하게 되거든. 친절을 다만 친절로 경험하고 좋은 기분만을 간직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생각이 복잡해지는 거야. 이미 나쁜 기억이 있어서 그런 걸까. 너는 어떠니. 너도 그런 생각 해? 친절에 두려움을 느껴?
그러니까 제니야, 이게 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살고 싶다는 말이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단 말이 아니야. 그런 일이 있었던 나로, 온전한 나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편에 서서, 제대로 살고 싶단 말이야.
나는 아직도 잠을 잘 못 자. 가끔 내가 누군지, 오늘이 며칠인지, 내가 몇 살인지, 뭘 하고 있었는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헷갈려. 내 기억을 신뢰하지 못해서 혼란스러워.
누군가 내게 상처 입힌 일에도 내 잘못부터 찾으려고 했다. 내 잘못을 찾을 수 없을 때는 타인의 잘못을 실수라고 이해했다. 나만 잘하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어른스럽다'라는 말을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고 자랐다. 책임을 묻거나 외면하거나 눙치려는 어른이 아니라 '미안하다'고 말하는 어른,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어른이 한 명이라도 나타나길 바랐다는 것을 어른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저런 어른이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내 잘못을 먼저 찾는다. 이제는 정말 그래야만 하는 어른이니까.
익숙한 감정 속에서 울다가 웃다가 지치고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 그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날도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제야에게 말했다.
나도 애쓰는 사람이 될 거라고 계속 말을 걸었다.
그리고
오늘도 제야는 하루를 기록한다. 제야는 보고 있다. 제야는 듣고 있다. 때로는 달린다. 전속력으로 달린다. 제야는 우리를 안다. 우리는 제야를 모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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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속에 잠겨 있는 칼. 빛을 반사하지 않고 속으로 품는 보석 같고, 자신을 반쯤 내보이면서 흙 속에 묻혀 있는 돌 같다. 단단하면서 뾰족한 칼처럼 진영은 아슬아슬 안전하다. 위태롭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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